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노스 7세 (문단 편집) === 마침내 단독 황제가 되다 === [[943년]], [[요안니스 쿠르쿠아스]]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에데사를 포위했다. 요안니스는 [[에데사]] 주민들에게 강화를 제의하고 모든 포로들을 돌려보내면서 그 대가로 [[예수 그리스도]]의 초상[* 당시 에데사는 2가지 보물로 유명했다. 하나는 아브가르 1세가 [[예수 그리스도]]에게 에데사로 와서 치료해달라고 초청했을 때 예수가 보낸 답신이었고, 또 하나는 예수의 초상이 기적적으로 남겨진 천이었다.]을 요구했다. 에데사 주민들은 비록 [[무슬림]]이었지만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어서 초상을 귀한 유물로 여기고 있었기에 그의 요구에 난감해했다. 그들은 [[칼리프]]에게 직접 문의하겠다면서 칼리프의 지침을 받을 때까지 공격을 유보해 달라고 부탁했다. [[944년]] 봄, 에데사 주민들은 칼리프에게서 "그대들을 구할 방법이 딱히 없으니 그리스도의 초상을 저들에게 넘겨라."는 답신을 받았다. 이에 주민들은 성대한 의식을 거행한 뒤 초상을 요안니스에게 넘겨줬고, 요안니스는 곧바로 엄중한 호위를 붙여 그것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. 8월 초, 그 초상은 보스포루스의 아시아 쪽 해안에 도착했고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 테오파네스가 직접 그것을 로마노스 황제에게 보냈다. 8월 15일, 그리스도의 초상은 금문을 통해 수도에 당당히 입성했다. 이 당시 로마노스는 몸이 아파 참석하지 못했고 흐리스토포로스는 [[931년]]에 사망했기 때문에, 나머지 세 황제가 총대주교와 함께 그리스도의 초상을 영접했다. 이 때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. 하나는 로마노스의 두 아들 황제들은 천에 남겨진 그리스도의 초상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콘스탄티노스만이 분명하게 알아본 것이다. 그리고 또 하나는 연도에 모인 군중 가운데에서 한 미친 사람이 느닷없이 뛰어나와 다음과 같이 외친 것이었다. >"콘스탄티노폴리스여, 영광과 축복을 받으라! 그리고 콘스탄티노스여, 제위를 받으라!" 이 무렵, 로마노스는 70대의 노인이었으며 [[수도자]]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국정에서 손을 떼고 신앙에 깊이 빠졌다. 또한 그는 두 아들 [[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]]와 [[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]]가 부도덕하고 방탕한 생활로 악명이 높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. 이에 그는 콘스탄티노스가 그의 두 아들들보다 선임 황제임을 분명히 못박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이를 공개하기로 결심했다. 그러자 두 아들들은 아버지를 막기로 결심했다. 944년 12월 20일, 두 형제는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황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끌어내 프로티의 어느 작은 [[수도원]]에 감금하고 머리를 [[삭발]]시켰다. 이후 두 형제는 콘스탄티노스를 제거하려 했지만, 여론이 콘스탄티노스를 열렬히 지지한다는 걸 깨닫자 어쩔 수 없이 콘스탄티노스를 공식적으로 선황제로 인정했다. 콘스탄티노스의 아내이자 로마노스의 딸인 [[엘레니 레카피니]]는 남편에게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촉구했다. 콘스탄티노스는 아내의 설득에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[[945년]] 1월 27일 두 공동 황제를 체포해 머리를 삭발한 후 아버지가 있는 프로티로 추방했다. 이후 콘스탄티노스는 두 형제를 격리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각기 다른 수도원으로 보냈다. 그리고 얼마 후,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가 간수를 살해하고 탈출을 기도했다가 감옥 경비병들의 칼을 맞고 죽었다.[*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는 레스보스의 레팀나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963년에 사망했다.] 이렇게 해서 콘스탄티노스는 25년 만에 단독 황제로 등극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